[스크랩] 이렇게 충격적인 유언장을 본 적 있나요?/ 안희환 시인(시 전문잡지 시인마을 발행인)
이렇게 충격적인 유언장을 본 적 있나요?/ 안희환 시인(시 전문잡지 시인마을 발행인)
우리나라 기업인들 중에 너나할 것 없이 인정하고 존경하는 분을 꼽으라면 유일한 박사님이 뽑힙니다. 그만큼 유일한 박사님은 아름다운 삶의 흔적을 남긴 분으로 유명합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정치자금을 거절했다가 혹독한 세무조사를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회사가 털어도 먼지 하나 나지 않는 것을 본 박정희 대통령이 “유한양행(유일한 박사님이 설립한 제약회사)은 앞으로 절대로 건드리지 말라”고 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유일한박사님이 처음부터 제약회사를 시작했던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미국의 디트로이트에서 라초이라는 식품회사를 운영하셨습니다. 라초이는 숙주나물 통조림을 파는 회사였는데 숙주나물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미국에서 제대로 팔리지 않았습니다. 회사는 상당한 경영난을 겪게 되었고요.
어려움을 겪던 라초이 회사가 살아나게 된 계기가 특이합니다. 숙주나물 통조림을 실은 라초이 회사 트럭이 백화점 쇼윈도우를 들이받는 사고가 터졌는데 그것이 라초이 회사의 알리는 기회가 된 것입니다. 뉴스에서 “숙주나물을 가득 실은 라초이 식품회사 트럭이 다운타운에 있는 백화점 쇼윈도우를 들이받는 사고가 있었다... 숙주나물은 만두 등 중국음식 만들 때 필수적인 재료이다”라고 보도를 했고 그 덕분에 라초이 회사의 숙주나물이 알려지고 잘 팔리게 된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사업자금이 마련되자 유일한 박사님은 귀국을 했고 1926년 12월 유한양행을 설립하였습니다. 목적은 돈을 많이 벌기 위함보다 더 큰 것이었는데 민족적인 대업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유일한 박사님은 여러 가지 일들을 진행했는데 1928년 [한국에서의 소년시절(When I was a boy in Korea)]이라는 영문책자를 간행하여 미국인들에게 우리나라의 문화와 풍물을 소개하였고, 또한 우리나라의 특산품인 화문석, 도자기, 죽제품 등을 미국에 수출하였습니다.
1971년 3월 유일한 박사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사람들의 관심이 그에게 쏠렸습니다. 엄청난 재산이 누구에게로 갈지 궁금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유언장이 공개되었을 때 세상은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일생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아닌 대한민국을 위해 헌신했던 유일한 박사님의 마지막도 결국 조국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유언장의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손녀에게는 대학 졸업까지 학자금 1만 달러를 준다.
2.딸에게는 학교 안에 있는 묘소와 주변 땅 5천 평을 물려준다. 그 땅을 동산으로 꾸미고, 결코 울타리를 치지 말고 중∙고교 학생들이 마음대로 드나들게 하여 그 어린 학생들이 티없이 맑은 정신에 깃든 젊은 의지를 지하에서나마 더불어 느끼게 해 달라.
3.내 소유 주식은 전부 사회에 기증한다.
4.아내는 딸이 그 노후를 잘 돌보아 주기 바란다.
5.아들은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가거라.
이런 놀라운 삶과 그 정신은 자녀에게로 이어집니다. 1991년에 딸 유재라 씨가 세상을 떠났는데 아버지의 숭고한 삶을 존경하던 그녀 역시 전 재산을 사회를 위해 쓰도록 기부하였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자기 자식에게 더 물려주려고 안달이 난 졸부들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유일한 박사님의 삶이 더 빛나는 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