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여유Ⅰ

문영은 2017. 5. 5. 17:30

 며칠째 가슴이 찢기고 있다. 똘똘뭉친 응어리가 치 받고 있어 약도 술도 위로도 효험이 거이 없다

 한으로 속병으로 연속되지나 않을런지..? 

 내 어릴 적 우리 집엔 해마다 찾아오시는 가을철 할머니 손님이 한 분 계셧다. 완주군 봉동할머니로 우리들을 무척 사랑하셨고, 어린 우리도 할머니를 따랐다. 그 할머니는 생강 보따리를 가져다가 동네 아낙네들에게 팔곤 했던 일이 생각난다

 기독교인이었고 신앙이 돈독해서 우리 가적들이 정성껏 환대를 해 드렸었다.

 어느 날 한밤중 그 할머니에게 큰 사건이 일어났다. 복통이 생겨 온 방을 소리지르며 뒹굴었다

 기왓장을 불에 달구어 수건으로 겹겹이 싼 후에 그것을 배 위에 올려놓고 가까스로 통증을 참아내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런 고통을 주기적으로 겪었다고 했다

 요즘 난 그 할머니의 가슴애피와 같은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좁은 생각 때문인가 양심과 인격을 분장하고 싶지 않은 까닭에 겪는 괴로움인가

 50억인구가 살고 있는 지구 위의 인생살이 모습은 한 가지 꼴이라 가정해도 50억 가지가 될 텐데…. 한 사람이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하면 수백억 가지의 삶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을 텐데….

 답답해야 할 이유가 별로 없는데도 몹시 괴롭기만 한 이유는 무엇 일까? 지구 위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고로 두 발을 디디고 있는 그 한 점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해도 온통 그 한 점만을 응시하며 쥐구멍 파고 살아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몸은 한 점 위에 서 있을지라도 마음은 지구를 포용해도 괜찮지 않은가?

 이에 이를, 눈에 눈을, 꼭 그렇게 1:1의 단순 대응 논리로 생활법칙을 삼을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앙칼진 목소리와 열기 어린 눈으로 시시비비를 가릴 이유 전혀 없을 거 같은데….

 찬물에 울화를 섞어 꿀컥 삼켜버리자꾸나. 그리고 너털웃음을 웃어 보자꾸나. 보다 멀리 보다 넓게 시선을 두어 보자.

 무대엔 연출하는 자들이나 올라가도록 하고 우릴랑 객석에서 박수로 그리고 웃음으로 응답해 주자.

 연출 내용이 달라졌다 해서 속상해 하고 흥분하는 일일랑 이젠 그만 두기로 하자.

 무대 위에서 뒤틀린 몸짓으로, 광기 어린 눈빛으로, 유혹의 음성으로 연출하던 사람들도 분장을 지우고 음성을 낮추고 정어린 목소리로 담소를 하지 않던가?

 약간의 여유를 갖자꾸나.

 상식과 정상체온과 양심을 가지고 정담을 다시 시작해 보자.

 흑백논리에서 과감히 탈출해 밝고 아름다운 만상의 색깔을 만끽해 보자. OX만으로 훈련이 된 교육환경 때문인가…. 아니면 죽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역사와 전쟁의 역사 환경 때문인가….

 정과 인과 신뢰가 메말라 갈 때 좋은 결과를 좋은 실적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위엄도 권위도 인간 신뢰와 애착이라는 바탕 위에서 뿌리가 내려지는데….

 서진 룸살롱 칼부림 사고를 뒷골목 살인 사고로만 일축할 수 있을 것인가?

 도처에서 칼 대신 힘으로, 관록으로, 직위로, 혀로, 붓으로 살인 행위가 자행되고 있는 현실이 아닌가?

 또 열이 오르나 보다. 머리도 가슴도 무거워지는 까닭이 무엇인가?

 이 아름다운 가을인데 계곡을 건너고 능선을 따라 정상에 올라서서 붉게 타오르는 산을 내려다 보자꾸나. 신선한 공기를 실컷 마시고 취기 어린 탁한 공기를 실컷 토해 내자꾸나.

 열도 음성도 정상을 되찾아 자연 속에서 정담을 나누어 보자.

 위험하게만 쌓아 올라가는 아집과 건위와 허구의 성을 맑은 계곡의 물로 씻어 보자.

 밝고 보장된 미래를 후배들에게 남겨주기 위해서 눈의 초점을 읽지 말고 여유를 가지고 숨쉬며 역사의 흐름을 지켜 보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