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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에게 믿음의 시련이 있을까?

문영은 2017. 6. 21. 21:56

  동전을 보면 양면이 있다. 한 면은 액면가가 숫자로 적혀 있고 또 한 면은 그림이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동전 한 개에 다른 모습이 그려져 있을 지라도 두 개로 보지 않는 하나의 동전 이다.

우리의 삶의 모습에도 양면이 있다. 한 면은 고통이라는 시련의 어두운 면이 있고 또 한 면은 축복이라는 밝은 면이 있다. 보기에 따라 때로는 축복이라는 보자기 속에 고통이 싸여져 있고, 때로는 고통이라는 보자기 속에 축복이 숨겨져 있다. 때때로 다른 모습으로 충격이 올지라도 하나의 삶으로 극복하며 소화해 가고 있다.

 

    왜 나만 겪는 고통이냐고 불평하지 말라고 불편한 몸으로 힘겹게 살고 있으면서도 귀한 믿음의 시를 쓰고 있는 송명희 시인의 싯구절이 생각이 난다. 내가 겪는 고통 중에 고통만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즐기는 축복 중에도 축복만 있는 것이 아님도 알 수 있어야 한다.

생각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모습으로 새겨 볼 수 있는 것이다. 명암이 있어 입체가 구별되듯 삶의 아름다움은 삶의 명암이 있기에 더욱 아름답게 표현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왜 우리에게 믿음의 시련이 있을까 새겨볼 이유가 있다. 성경 말씀에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하신다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알라 하신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하신다우리가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하신다 약속하신다,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하신다.

그리하면 주시리라 말씀하신다. 당하고 있는 시험 가운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시험을 당할 때 좌절과 비난과 포기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자세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감사와 기도와 기쁨으로 하나님의 때까지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내를 이루어 내야 한다. 성숙하게 하시고 온전케 하시고 부족함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알아야 한다.

시련도 인내도 온전케 하심도 후히 주심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하심 임을 알고 감사해야 한다.

 

심장이 고동칠 때 맥박이 정상적으로 뛰어 신체가 건강을 유지하고 있지 않은가?

파도가 바다에 일고 태풍이 몰아쳐서 바다가 온통 뒤집힐 때 바다가 생명이 있는 건강한 바다로 변화되지

않던가? 밤과 낮이 교대가 되어 활동과 쉼의 리듬을 유지됨으로 생명체 들이 건강한 생명의 유지가 가능하지 않던가?

 

때로는 고통과 시련이 견디기 힘들지라도 살아 있음을 알리는 큰 생명체의 신호임을 알 수 있다.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보아도 수 많은 영욕의 기복이 삶의 리듬 이었고 흔적 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살아 있는 동안에 호흡이나 맥박처럼 삶의 리듬으로 삶의 명암이 반복 되지 않겠는가?

싫다고 싫은 부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전체도 인정할 수 없는 이치 아닌가?

구름이 덮여있는 하늘도,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도 우리가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수시로 변화되면서

찬란한 햇살로, 눈 비로 지구의 생명을 유지해 주지 않던가?

 

어느 아이가 너머지지 않고 걸음마를 배우던가? 사는 동안 얼마나 많은 걸음마의 행보 과정을 겪으며 살아가는 인생인데, 너머지고 좌절하고 애태우는 시련의 과정의 반복이 우리네의 삶이 아니던가?

시련과 고통의 시간이 닥쳐 올지라도 그 것이 단지 삶의 한 부분일 뿐인데..

또 다른 면의 축복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뜻을 새기며 인내하고 감사하며 살아 가야 할게 아닌가?

주마등처럼 펼쳐보면 아름다운 추억의 그림들이고 하나 하나 감사의 제목들이지 않던가?

 

가끔 산 등성이에 올라 맑은 공기를 깊이 마시고, 맑은 하늘과 그 위를 흐르는 아름다운 구름을 바라보는 지혜도, 또 아무도 바라보지도 않고 귀하게 여기지도 않는 야생화를 바라보며 그 매력을 찾아 보는 지혜도밀린 일들과 고뇌를 젖혀두고 육자배기로 누어 깊은 잠을 청해 신체의 리듬을 한 박자 늦추어 보는 지혜도, 무턱대고 시장에 나가 사람들 사이에서 시장 냄새 맡아가며 옛날 과자랑 소박한 잡동사니를 사보는 지혜도, 일도 마음의 짐도 모두 내려놓고서 오래 동안 소식이 끊겼던 친구나 가족들의 안부를 묻거나 덕담을 나누는 지혜도, 허물없는 친구를 만나 아무 거리낌 없이 담소를 나누는 지혜도.. 잠깐 눈을 감고 모든 급한 생각을 내려놓고, 조용히 묵상하며 피로를 회복하는 지혜도..격한 운동을 끝내고 숨 고르기 하는 모습으로, 일상으로의 회복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지치고, 힘들고, 막히고, 너무도 고통스러워, 무모하게 삶을 포기하려 했던 경험이 누군들 없었겠는가?

내 삶이 내 소유가 아니고 우리 모두의 공동의 삶의 일부인 것과, 겪고 있는 시련이 또 다른 하나의 축복이라는 것과, 하나님께서 내 삶의 주인으로서 함께 하시고, 내 삶을 통해 계획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머리 숙여 감사 기도하는 모습이 축복이 아닌가?

부끄러운 모습 그대로, 때로는 어색하고 불안해도, 크게 자랑할 것이 없어도, 이 모습 이 대로 좋지 않은가?


 부족함 때문에 불안해 하는 것은 바보스러운 모습들이다.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그 부족함 때문에 우리는 노력하는 잠재력이 발견되고, 도움을 받고 주는 길을 찾게 되며, 그 마음이 모여 

협력하는 사회를 이루게 된다. 하나님께 간구하고 감사하는 믿음도, 온전치 못함에서 비롯됨을 깨닫고, 그로인해 겪는 시련들에 대한 가치를 발견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모자란 면을 보고 비웃거나 무시하며 그것들을 이용해 자기의 이익을 취하는 모습을 가끔 본다. 

 

 이제는 사회적으로 상대적 약자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야 한다. 또한 제도적으로도 보호하는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상처는 치유되어야 하고 아픔은 위로 받아야 한다. 개인적인 시련의 슬픔도 방치해서는 안 된다.

부족함을 채우는 손길도, 인내의 과정도, 자라고 온전하게 변화 되는 모습들이 모두 하나님의 축복 임을

알아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 모두가 함께 알아 갈 수 있도록 분위기와 사회적 제도를 만들어 가야 한다.


  시련의 아픔을 극복한 경험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경험을 우리와 우리 역사가 간직하고 있지 않은가?

자라나는 세대는 때로는 부족할 지라도 그 것을 축복으로 바꾸어 가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길 기도한다.

시련의 고통의 다른 하나의 이름은 인내의 극복이라는 축복 임을 새기며 살아가길 기도 드린다.

어두움과 밝음이 어우러져 명암을 이루어 내듯, 밤과 낮이 어우러져 하루를 이루어 내듯, 희로 애락이 

어우러져 삶을 이루지 않는가? 부분만을 선택적으로 고집하지 않고 전체를 아우러 품어 내어야 한다.  

아집과 집단적 이기심이에서 벗어나 총체적 상황을 품고 고민하는 삶을 살아 가길 기도드린다. 

격고 있는 시련이 곧 축복이라 는 믿음으로, 멋지고 행복한 삶을 기쁘게 살아 가길 기도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