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침묵했었다
나찌가 공산주의자를 잡으러 왔다.
나는 침묵하고 있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사회주의자를 잡으러 왔다.
나는 침묵하고 있었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다.
그 뒤에 그들은 노동조합원을 잡으러 왔다.
나는 그 때도 침묵했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다.
그 뒤에 그들은 유대인을 잡으러 왔다.
나는 침묵했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들이 나를 잡으러 왔다.
나를 살려줄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았다.”
마틴 니믈러
(Friedrich Gustav Emil Martin Niemoller)
(1892.1.14~1984.3.6)
마틴 니믈러의 고백
자기를 잡으러 오지 않았다고 침묵으로 일관하며 악에 대하여 침묵으로 방관했더니 마침내 그 악인들을 자신을 잡으러 오더라는 고백입니다. 악한 사람들이 악을 행할 때에 침묵하고 있으면 그 악한 사람들은 언젠가는 나를 잡으러 오게 된다는 교훈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
우리는 악한 정치에 대하여 함구하는 것이 미덕인 줄 알고 악한 사람들이 악한 정치를 할 때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악을 악이라고 말하지 않고 보신주의(保身主義)에 안주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한국의 기독교는 악한 정치를 향하여 일절 바른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의 의식은 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목사의 입에서 어쩌다가 사회적인 약자를 대변하려는 설교를 하게 되면 듣는 성도들은 매우 심기가 몹시 불편해 합니다. 반대로 설교자가 부자들과 기득권자를 대변하고자 하는 설교를 하게 되면 전혀 정치적인 설교라고 생각하지 않고 전혀 다른 자세로 받아들입니다. 약자들을 위한 발언은 정치적인 발언이라고 비난하지만, 부자들이나 권력자들을 두둔하는 발언은 아무도 문제를 삼지 않고 아 멘으로 수용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대형 교회에서 숨김없이 그대로 권력 집단을 옹호하고, 약자들의 아픔을 왜곡해도 '아멘'으로 화답하는 이런 모습들을 주님께서는 어떻게 보실까요? 교회가 부자들의 교회이기 때문일까요? 제가 보는 대로는 전혀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교회의 성도들이 이 사회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무조건 권력자 편을 들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국민의 정부 시절이나 참여정부 시절에는 목사가 아무리 정부를 비판하는 소리를 해도 교회나 성도들이 이를 정치적인 언사라고 문제를 삼는 사람이 일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부터는 잘 못된 정치나 정책에 관해서 무슨 말을 하든지 목사가 정치적인 말을 하는 것을 바람직하지 않다고 떠들어댔습니다.
백해무익한 사대 강 사업을 위해서는 22조원을 쏟아 부어도 문제가 없다고 하던 사람들이 초중학생 점심 한 끼 무상급식하자고 하는 말이 나오자 종북 좌파라고 매도하는 것이 이 나라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우리교회는 부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사회적인 약자를 위한 설교나 강의를 들으면 불편해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아예 저를 향하여 좌파 목사라고 노골적으로 이야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 임기 만료가 되고 나서야 사대 강이 녹조로 뒤덮이고 강물이 썩어가고 큰빗 이끼벌레라는 괴생물체가 언론에 보도되자 성도들의 태도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지금 와서는 우리 교회 성도들이 자세가 참 많이 달라졌습니다.
정치의 기본적인 목적은 상대적으로 약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억울한 사람이 없게 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우리나라의 정치 수준은 한참 멀었습니다. 약한 사람, 가난한 사람, 어려운 사람, 억울한 사람을 이야기만 하면 정치적인 발언이라고 하면서 종북 좌파로 낙인을 찍으려고 하는 것이 한국 기독교인입니다. 종북 자파라는 말은 기독교와 친일파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목사가 하나님 말씀만 전하겠다고 하면서 시사적(時事的)인 이슈에는 완전히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이 시대의 정치와 사회에 대해서는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정치적인 사안에 대하여 일절 함구 하고 아득한 먼 옛날 이스라엘 이야기만 하고 있는 목사를 과연 이시대의 목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억울함과 슬픔을 당한 국민들의 눈물과 탄식과 울분에 대해서 일절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성도들의 삶과는 동떨어진 이야기들과 성공 신화와 죽은 후에나 가게 될 내세의 소망을 설교하는 목사가 있다면 그러한 목사를 참 목사라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 눈앞에서 벌어진 약자들의 참담한 현실에 대하여 일언반구 언급도 없이 입장 표명도 하지 않는 목사가 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까?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결단하고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바른 말을 하지 않는 목사를 어떻게 목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4월 16일 이후, 8월 31일이 되면 25번째 주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목사라면 그 동안 주일 낮 설교만 해도 24번의 설교를 했고 주일 저녁 수요일까지 합하면 60번 넘어 설교를 했습니다. 그 동안에 세월호 참사에 관해 교인들이 신앙적으로 어떤 입장을 견지해야 할 것인지 설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어느 나라 목사라고 해야 하겠습니까? 언급은 했더라도 오히려 가진 자들과 권력자를 두둔하며 세월호 유족들을 비하하는 식의 설교를 했다면 그런 사람도 목사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회적인 큰 아픔 속에서 진실을 규명하려는 유족들의 외침에도 침묵하고 있는 것이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는 길인가 하는 것입니다. 유민 아버지라는 사람 김영오 씨가 40일 동안 생사를 넘나드는 단식을 하며 수사권과 기소권이 포함된 특별법을 요구하고 있음에도 단 한마디 언급하거나 기도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만 전한다고 한다면, 그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나라 기독교 목회자 중에 약자 편에서 바른 말하던 사람이 몇 사람 있었습니다. 김진홍 목사와 인명진 목사와 서경석 목사와 같은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점점 변질 되어 마침내 뉴라이트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거기서 상임고문역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신들이 어려울 때는 약자를 대변하는 모습을 보이던 분들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말하는 것을 보니 완전히 변절되어 친일파를 두둔하는 단체에서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능동적으로 저지르는 죄만이 죄가 아니라 불의와 죄악을 보고 입을 다무는 것도 죄라고 규정하십니다. 즉, 악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현장에서 그것을 방조하는 것 역시 죄라는 것입니다. 강자가 약자를 부당하게 억압하고 있을 때 제 삼자의 입장에서 침묵하는 것도 죄가 되는 것이고 악한 정책과 정치로 사람들이 피해를 당하게 되는 것을 보고 의로운 통책을 하지 않는 것도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부정과 죄악들 앞에서 눈을 감고 입을 다물어 버리곤 했습니까? 무엇이 악이고 선인지 충분히 판단할 능력이 있으면서도 자신에게 돌아올 불이익이 두려워 아무 말 하지 않거나 악인의 보복과 내게 돌아 올 불이익을 계산하면서 침묵으로 동조한 경우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우리에게 어떤 불이익이나 보복이 돌아온다 할지라도 진실을 말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이며 윤리입니다.
잘 못된 정치인들이 권력을 오남용 하거나 직무를 올바로 수행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억울하게 사람들이 죽었는데도 그런 정권에 대하여 속으로 분개하고 혐오한다 해도 겉으로 그저 외면해 버리고 만다면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의 악에 대하여 묵인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흔히 죄인들을 경멸하고 외면하는 것만으로 그들의 죄와 무관하다고 생각하며 만족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제시하는 윤리관에 비추어 볼 때 의인들의 침묵이나 교회의 침묵은 분명히 죄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사회적인 정치적인 죄악을 방관하고 외면하고 침묵함으로써 그것이 점점 더 크게 자라서 마침내 더 큰 악을 초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악이 증폭되도록 방관한 데 대한 책임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잘못된 행동이나 말을 배울 때 야단치는 것이 번거롭고 귀찮아 그냥 내버려 둠으로써 그 아이가 불량배로 자란다면 누구보다도 그 부모의 책임이 크듯이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악한 정치인들에 대하여 우리는 침묵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히틀러 당시 독일의 젊은 목사 디트리히 본회퍼는 독일의 히틀러와 나치의 만행을 그냥 보고 있지 않고 그들과 대항해서 싸웠습니다. 심지어 히틀러 암살단과 함께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독일의 루터교회는 나치 정권에 대하여 침묵하거나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나치의 만행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았습니다. 독일의 루터교회와 독일의 가톨릭교회가 히틀러의 악한 정치와 정책에 대하여 침묵하였고 그 결과는 나라와 민족을 패망과 함께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선한 사람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침묵하면 악은 승리한다.”
미국의 휘그당 하원의원 에드먼드 버크가 한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환경, 위생, 미디어, 가정,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경건의 가치를 자기 시대에 실현되도록 바른 말을 해야 한다.”
성경이 악이라고 말하는 것을 악이라고 지적을 해야 하고 바른 길을 제시하고 가르쳐야 하고, 악에 대하여 침묵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악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강도만나 거의 죽게 된 사람을 버려두고 자신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몸이기 때문에 손에 부정한 피를 묻힐 수가 없다고 그냥 지나가는 제사장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달게 받으시겠는가 생각을 해 보셔야 합니다.
악한 정치를 대적하다가 자신에 돌아온 불이익을 계산하고 보신주의(補身主義)로 기울어진 사람의 기도와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인가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입법부와 사법부와 행정부가 존재하는 목적은 세상에서 억울한 사람이 없게 하는 것이 그 목적이고 약한 사람을 보호하는 것과 도와주는 것이 사명입니다. 교회는 정치인들 즉 입법 사법 행정부가 이러한 기본적인 일을 태만히 하거나 소홀히 할 때 반드시 바른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의 목사들은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악한 정치인들 편에서 그들을 두둔만 해 왔습니다.
1986년 노벨상은 수상한 루마니아의 작가 엘리 위젤은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였습니다. 그는 수상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학살이 진행되고 있을 때 유럽의 지성인들은 나치가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고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지만 침묵했다.”라고 말을 시작했습니다.
학살을 자행한 나치의 죄만 생각했지 자신들의 방관이나 침묵이 죄가 된다는 것을 아무도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국경과 인종을 초월해서 인권이 유린되거나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이 위협을 받을 때는 누구든지 침묵으로 방관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서서 악을 악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수상 연설의 요지였습니다.
마르틴 루터킹 목사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흑인들을 직접 박해하는 사람들보다도
지성인들이 침묵에 대하여 소름이 돋는다는 말을 했습니다. 엘리 위젤
악을 보고 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만약 말을 해야 할 때 침묵함으로써
하나님과 역사 앞에서 우리가 방조자 동조자 묵인자 공범자가 될 수가 있습니다.
헤롯왕이 헤로디아를 취한 일이 죄라고 지적한 세례요한이 감옥에 갇히게 되고 결국은 사형을 당했습니다. 헤로디아가 세례요한의 목을 요구했던 괴기한 현장에서 무수한 귀인과 방백들이 침묵을 한 것입니다. 거기 있는 귀족들과 방백들은 분명히 세례 요한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내심 존경하고 두려워 하면서도 누구나 그 부당성을 지적하거나 생명을 구하려 나서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다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때 동석해 있었던 귀인들과 방백들이 직접 살인한 것은 아니나 간접적으로 그 살인에 대하여 침묵한 죄, 방관죄는 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분명한 악을 보고도 모른 척 하는 것이나 비굴하게 침묵하는 것은 다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쟁반 위에 담겨진 세례요한의 머리가 그 때 그 침묵하던 귀인들의 죄를 묻지는 못하겠지만 주님께서는 헤롯 왕의 죄와 그 자리에서 함께 있으면서도 침묵으로 그 끔찍한 죄를 묵인한 귀인들의 죄를 헤로디아의 죄와 같은 죄로 보실 것입니다.
인자(人子)들아 너희가 당연(當然)히 공의(公義)를 말하겠거늘
어찌 잠잠(潛潛)하느뇨 너희가 정직(正直)히 판단(判斷)하느뇨(시편5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