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시골집 마당은 꿈의 고향이요 생활의 터전이었다.
봄철에 농사일을 준비했던 장소요, 마감했던 장소이었고, 또한 보관하는 장소이었다.
훼에서 닭이 울 제 하루가 시작되었고, 어둠이 마당에 깔리면 하루가 끝났다.
눈보라가 칠 때도 볏가리와 곡식 통가리가 마당을 늘 지켰었다.
이른 봄 노오란 병아리와 어린 애들이 걸음마를 함께 배웠고, 꼬마들은 자치기도 땅뺏기도 재기 차기도 하면서 그 곳에서 자랐다.
풍년을 기약하거나 감사를 드리는 제반 명절의 풍약잔치도 그 곳에서 베풀어졌다.
한여름 콩 타작 보리타작은 물론이요, 가을철 누우런 곡식의 탈곡도 그 곳에서 했다.
여름 밤 모깃불 피워 놓고 평상을 가져다 놓으면 훌륭한 휴식처가 되어, 온 가족이 함께 자리하고 하루의 피로를 그 곳에서 풀었다. 할아버지는 꼬마에게 구수한 옛날 얘기를 들려 주었고 꼬마는 그 얘기를 들으면서 잠이 들었다.
시골집 마당은 아이들이 꿈을 키우는 꿈의 도장이었고, 가족의 정을 싹 틔우는 곳이었고, 생활의 터전이었다.
내 어릴 적 우리 집 마당엔 살구나무가 있었다. 아름드리 살구나무는 이른 봄에 늘 화사한 꽃으로 우리 집을 장식했고, 여름엔 노오란 살구를 가족에게 선사했으며, 또한 한여름엔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노오란 살구는 맛이 참 좋았고, 먹고 남긴 씨는 잘 말렸다가 한약방에 가져가면 계피랑 감초랑 바꾸어 주었다. 우리는 그 큰 살구나무에 올라가 노래를 불렀고, 새를 잡았으며, 그늘 아래 평상은 우리 동네 꼬마들의 집합장소였고, 가족의 휴식처였다. 우리 가족은 6·25 사변 때 피난을 시골 오촌 숙부님 댁으로 갔었고, 그 해 여름을 그 곳에서 보냈다. 작은 방 하나에 온 가족이 함께 살았고, 그 어려운 살림을 거의 마당과 그 방에서 했었다.
누님이랑 나는 솔방울을 열심히 주워 가마니에 담아 처마 밑에 쌓았다. 풀무로 그 솔방울을 화덕에 지펴 감자와 보리쌀을 익혀 어린 우리들 허기를 메꾸었었다.
피난살이가 끝난 후 돌아와보니 내 살던 살구나무집은 폭격에 안채가 헐어졌었으나 살구나무에서 여전히 어린 마음은 위안을 받았었다. 그 후 우리는 그 집에서 다시 살지 못했었다. 그러나 언젠가 그 집 살구나무를 체인으로 감아 차로 뽑아내는 것을 보고 오래오래 서운한 맘이 가시질 않았었다.
그 후 나는 마당이 없는 여러 집을 전전했었고, 마침 학교도 수용소와 훈련소로 활용이 되었던 고로 전교생은 흩어져 공부를 해야만 했었다.
때로는 절터로 때로는 활터로 때로는 채소 공판장 창고로 돌아다니며 공부를 했었다. 책상이 없어도 마당이 없어도 불평 한마디 할 수 없었고, 단지 공부를 계속 할 수 있었다는 데 행복을 느끼고 살아야만 했다.
6학년 때에 겨우 남의 학교 절반을 빌어 쓸 수 있었고, 졸업식도 남의 학교 운동장에서 할 수 있었다.
중학교 시절은 어려운 살림이지만 우리 힘으로 이겨 가며 살아 보자고, 농사도 짓고 돼지도 기를 수 있는 집으로 이사를 했었다.
열심히 일했고 정성을 쏟아 가축을 길렀다. 그러나 사료의 어려움, 질병의 대책은 속수 무책이었다.
밤만 새면 두서너 마리 닭이 훼에서 떨어져 있을 때, 돈 콜레라가 30여마리 돼지를 모조리 앗아 갔을 때, 공판장에서 애써 가져간 호박, 오이 값이 휴지 값이었을 때 가슴이 무척이나 아팠었다.
그러나 봄철엔 노오란 병아리가 항상 마당에서 놀았고, 늘 강아지가 마당을 지켰고, 항상 푸짐한 일거리가 있었고, 돼지는 늘 꿀꿀댔었다. 그러나 증조모님, 조부모님을 모시고 온 가족이 사병 통에도 흩어지지 않고 같이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한 생각을 가질 수 있었다.
경제적 여유는 없었으나 항상 바쁘고 피곤해 있었다. 그러나 항상 우리의 성장을 지켜보시던 조부모님과, 신앙으로 우리를 지켜 주시던 증조모님과 사랑으로 감싸주시며 인내와 사랑을 가르쳐 주시던 어머님과 그리고 항상 불평 없이 근면하게 노력하며 낙오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던 사랑스러운 형제들과 함께 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만족했었다.
일거리 많던 그 마당에서 우리는 땀을 흘리며 꿈을 다듬어 왔었다.
신혼시절 살던 집 마당은 늘 먼지가 소복히 쌓이곤 했었다.
쌓인 먼지를 빗자루로 쓸어내면서 이 마당이 내 마당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늘 있었다. 특히 어린아이가 기어 다니다가 회벽을 뜯어내며 심술을 부릴 때, 주인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때 한없이 야속스러웠고, 어린애가 뒹굴 수 있는 마당이 없던 것이 그렇게 서운하기만 했었다.
요즈음은 마당과 앞길 청소는 내가 즐겨 맡는다.
이슬 내린 마당을 쓸고 있노라면 강아지가 온 몸을 흔들며 반겨 준다.
아직도 잠에 취해 몽롱해 있어도, 때로는 손님 덕택에 마신 술이 덜 깨어 있을 지라도 맑은 공기는 몸과 맘을 새롭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또한 하루의 일은 조용히 설계하기에도 안성맞춤인 시간이다.
무더운 밤이면 가족들과 마당에 나가 얘기를 하노라면 하루의 피로가 절로 풀린다.
불볕더위로 달구어진 회사 콘크리트 마당은 한참 분주하기만 하다. 차들은 바삐 드나들고 직원들의 땀 흘리는 모습은 바로 생활의 현장 그대로이다.
요즈음의 마당 없는 아파트 생활은 조금 덜 움직이며 편히 살 수 있을지언정 생활의 여유와 꿈의 고향을 잊어가는 생활이리라.
고독을 씹으며 넓다란 고향의 향수를 달랠 길 없어 스스로 귀한 생명을 포기했던 아파트 노인의 심경을 짐작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