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이 쏟아져 나온다.
닦을수록 쓰라림이 눈 속을 파고 들다가 가슴과 뼈마디까지 파고든다.
분노와 함성이 유리와 벽돌의 파편이 되어 발부리를 걷어찬다.
하얀 최루가스가 장단이 되었고 재치기가 가락이 되었다.
시댁은 대학촌에서 아기를 키울 수 없다고 이사 갔고, 가끔 가게 문을 내리고 눈물을 흘리던 아저씨는 집세도 못 내겠다고 하소연이다.
낭만어린 교정엔 아직도 제비모습이 나타나지 않고, 우거진 신록엔 새들의 울음소리가 곁들이지 않아 답답하고 염려스럽기만 하다.
5층 교수실엔 최루가스가 배어 있어 오시는 손님들은 물론 방주인의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다.
학내식당의 유리창은 창이 아니고 벽도 아니다. 심지어 바닥까지도 대자보전시장이요. 벽보판이다.
물결처럼 분노의 함성이 스쳐갈 때마다 혼돈과 불쾌감이 극치를 이룬다.
침묵을 지키며 눈물만 흘리던 학구파들의 냉가슴까지도 열이 달아 있다.
부모 예우를 받던 교수들이 과격파 학생들에게 채이고, 목 잡히고, 삭발까지 당하는 사례가 발생되었다.
급기야는 모처의 대치상황 끝에 엎지른 신나에 불을 질러 경찰 몇 사람을 산채로 화장해버렸다.
중풍환자를 마냥 뜬 눈으로 보고만 있었다.
성스럽던 졸업식 풍경은 어디가고 학생도, 부모도, 스승까지도 가슴엔 응어리만 남았다.
땅도, 아파트도, 증권도 크게 뇌동하더니 또 사정없이 곤두박질한다.
당국의 장담은 울리는 메아리요, 술래잡기 신호일 뿐이다. 재주꾼들은 기기묘묘하게 빠져나가곤 한다.
성실하게 평생을 노력한 근로자나 공무원의 퇴직금으로 시내 집 한 채 사기가 힘들고, 심지어 시내 중심지역 한 평 값에 훨씬 못 미치는 형편이다.
절대빈곤은 많이 없어졌으나 상대빈곤의 골이 너무 깊어만 가고 있다.
도둑들은 철을 만났고 도둑수단은 치안수단보다도 기법이 앞서 발전되고 있어 치안담당자들은 애로가 말씀이 아닌가 보다.
전자동 고문을 확인한다고 현장에 나갔던 국회의 모 의원과 경찰의 모 간부가 몸싸움 벌인 것이 불씨가 되어 몇 천 명의 경찰이 사표를 내어 던졌다.
신물도 날만 할 게다. 울분도 솟구칠 만할게다. 중립적 입장에서 치안이 유지되어야 출혈이 적고 자체의 권위와 힘이 축적될 텐데…….
과로, 박봉, 최루가스……. 선심 쓰는 사람들, 몸으로 때우는 사람들……. 울분을 터뜨리고도 남음이 있을게다.
질서 잡는 사람들이 무력해진 이유가 무엇인가…..? 동네북으로 전락된 까닭은 무엇인가.....? 이들에게 사명감을 다시 부여하고 질서와 기강을 힘 있게 세우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출근길에 본 장면이 가슴을 짓누른다. 벽보를 붙이는 자 쥐어뜯는 자가 뉜고? 질서를 지켜야 할 사람, 지성을 지켜야 할 사람이 궤도를 벗어난 까닭이 무엇이며, 목적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은 얼마나 많은 후유증을 남기고 있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가?
대구 방화 살인 사건 이후 학생들의 자성의 모습에 조금은 자위를 해보나 의심이 아직도 가시질 않는다. 민주주의란 여차가 궤도를 정상적으로 달릴 수 있으려면 아직도 큰 희생이 치루어져야 될 것 같은 우울한 느낌이 든다. 모두들 이제부터라도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할게 아닌가.....?
소리 지르면, 궐기하면 해결될 수 있는가.....? 또한 폭력까지 동원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무질서 사회가 사회성장의 기본 원동력이 되어서는 불행한 역사를 반복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추론될 수밖에 없지 않는가?
자기주장을 궐기하고픈 사람들, 소릴 지르고 싶은 사람들에게 스트레스 해소장소를 별도로 만들어 줌이 어떨지? 또한 교통의 마비나 사회질서와 공공이익의 파괴나, 기업운영방해 등의 무궤도의 폭력은 강력히 통제함이 어떨지?
국가의 안전성장, 사회의 복지, 교육의 투자 등은 누구도 방향을 역방향으로 끌고 가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방종과 자유는 구분되어야 하며, 개인의 번영은 사회번영의 범주 안에서만 가능하도록 공권력이 힘을 가져야 한다.
몇 몇 훈련된 과격파 학생들에 의해 다수의 학생이 방황해서는 안 된다.
교수들은 용기와 의욕과 자세를 되찾아야 한다. 인격도야의 장이 또한 민주시민의 모델이 육성되는 장이 유령의 집마냥 황량하고 피폐하도록 방치해서는 절대 안 된다.
옜적 글을 다시 읽어보며 자구 수정을 하여 올려 놓는다.
1982년 어느날에 심한 사회 갈등을 괴로워하며 썼던 글이다.